부안21

▲청림 노적메 마을에서 본 쇠뿔바위, 의상봉은 정상은 구름이 가리고 있어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2004부안21

비 갠 후의 변산풍경

태풍 ‘민들레’가 명을 다할 쯤인 어제(5일) 아침 8시경 우슬재를 넘어 내변산으로 들어섰다. 10시경엔 하늘이 거치기 시작해 모처럼 햇볕이 ‘쨍’하고 났지만, 그 시각만 해도 하늘을 온통 뒤덮은 검은 구름사이에선 금방 비라도 한 줄금 뿌려댈 기세에, 아직 소멸하지 않은 바람이 강하게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는 통에 꽃 사진을 근접해 찍기가 여간 힘들었다.

강수량이 적어서인지 어수대 폭포 그림은 물줄기가 가느다란 게 기대 밖이었다. 임금 ‘어’를 차용해 쓰는 어수대(御水臺)는 분명 사연이 있는 이름일 것이다.

▲어수대, 강수량이 적어서인지 어수대 폭포 그림은 물줄기가 가느다란 게 기대 밖이었다.ⓒ2004부안21

고 강성채 선생은 백제 부흥운동 당시 ‘풍왕’이 다녀 갔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다녀 갔다고도 하는데, 부안의 향토사학자들도 대체로 '경순왕 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편이다. 이를 근거한 기록인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에는 "왕재암·석재암-둘 다 변산 옥순봉 동쪽에 있다. 4면 석벽이 가파르고 높은데, 그 위는 후미지고 평평하여 완연한 천성(天成, 하늘이 이룩한 일)으로 암자가 그 안에 있으며, 두 절이 서로 잇닿아 있다. 그 동남쪽에 어수대가 있고, 서남쪽에 왕등암(王登菴)이 있는데, 모두 낭떠러지가 천길이어서 사람이 기어오를 수 없다. 절에 기(記)가 있는데 '암자는 정심두(正心頭陀)가 창건하였다. 신라왕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이곳에 이르러 즐기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이에 왕재(王在), 석재(釋在), 어수(禦水)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중기에는 부안이 낳은 여류시인 이매창이 이곳에 와 시 한 수를 남겼다.

登御水臺

王在千年寺空餘御水臺
往事憑誰問臨風喚鶴來

어수대에 올라

천년왕업의 옛터엔
겨우 어수대만 남았어라
지나간 옛일이야 누구에게 물으리오
바람맞으며 서서 학만 불러보네
-허 경진 역-

▲어수대 입구에 피어있는 원추리와 범부채ⓒ2004부안21

어수대를 지나 청림에 들어섰다. 부안에서 제일 경치 좋은 산간마을을 꼽으라면 청림, 그 중에서도 노적메 마을을 꼽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안의 어른신네들..., 부안에서 살기좋은 마을을 순서대로 1옹정, 2노적... 하는 식으로 꼽는 걸 본 적이 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이 보아도 수려한 산세 속에 자리잡은 그림 같은 마을이다. 이 마을엔 고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산다.

▲태풍 ‘민들레’ 가 노적메 마을 복숭아 밭을 온통 휘젓고 지나갔다.ⓒ2004부안21

청림 미선나무군락지가 있는 삼거리에서 들독거리(거석리)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길로 곧장 가면 바디재를 넘어 선계폭포, 우반리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야 구불구불 산길로 재를 넘었겠지만 지금은 포장도로가 나있다. 개인적으로 ‘이 길만은 아스팔트 포장을 안했음 좋겠다’ 했는데..., 포장이 이미 돼 있다.

거석리, 큰 돌이라는 뜻이 아니다. 들擧에 돌石자를 쓴다. 돌을 든다는 뜻으로 순수 우리말 마을 이름은 ‘들독거리’다. 지금도 부안의 웬만한 사람들은 이 마을을 들독거리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는 들독에 관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거석리에서 바디재를 오르다보면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하고도 우람한 남근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 지역에나 남근바위가 있어 소개가 많이 됐는데, 거석 마을의 이 남근바위는 크기나 형상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 한다. 깍아서 세운 순창 지역의 남근석보다 훨씬 더 리얼하다.ⓒ2004부안21

"옛날에 '가마소' 계곡에서 기골이 장대한 여아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힘이 세어 남자들도 꼼짝을 못하였는데, 어느 날 가마소 골짜기에 있는 큰 돌을 치마에 담아가지고 이 거석마을 앞까지 쉬지 않고 오더니, 돌을 내려 놓고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후에 마을 청년들이 이 돌을 들어보려고 여럿이 힘을 합하여 보았으나 돌은 들을 수 없었고, 겨우 움직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의 이름이 여장사가 돌을 들어다 놓았다 하여 '들독거리', 즉 거석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출처. 전설지, 전라북도 간)

▲선계폭포ⓒ2004부안21

비온 뒤 바디재에서 우반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왼쪽 저수지 너머로 비류직하 하얀 물줄기가 꽂힌다. 선계폭포다. 선계안골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다. 이 선계안골엔 이성계가 소시적에 이곳에서 수도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들은 고집스럽게 선계폭포를 성계폭포라고 부른다.

조선 중엽의 부안사람 동상 허진동은 우반동 일대 절경 10곳을 뽑았다. 이른 바 '우반10경'으로, 그 중의 1경이 바로 '仙溪晴瀑'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은 허진동의 '우반10경'에 부쳐 시(아래)를 지었다.

그 10여년 후, 허균은 아예 변산에 눌러 살 요량으로 이곳 어디에 있었다는 정사암에 와 쉰다. 그때를 그는 그의 산문집「성소부부고」卷6 文部三記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 남겼던 것이다.

허균의 '중수정사암기'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허진동의 우반십경에 부쳐 지은
사암 박순의 '선계청폭' 시를 아래에 옮겨본다.

선계의 맑은 폭포/仙溪晴瀑

사암 박순

한결같은 맑은 소리 구름 끝에 쏟아지고
번쩍이는 푸른 벼랑에 모인 물 쏘는 듯하네
하얀 집 같은 물 은하수와 견줄만하고
신령스런 맑은 샘 있는 곳 누가 다 찾으리

淸聲一注來雲抄
閃閃靑崖射亂潨
白練銀河徒比幷
靈源澄處有誰窮
/출처:'동상선생문집'

선계폭포를 감상한 후 몇 발작 내려오면 반계 유형원 유적지 입구에 이른다. 반계 유형원은 허균이 이곳에 머무르다 떠난 몇 년 후인 1622년에 우반동에 내려와 그의 뛰어난 경륜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반계수록을 집필하며 20여년을 보내고 또 생을 마감한 곳이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