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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각 집을 돌아가며 함께 김장하고, 그래도 집집마다 맛은 그대로 살리면서, 모이고 이야기 나누며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산기마을의 김장철 풍속이다. ⓒ부안12

변산의 조찬준

변산을 특별나게 하는 것들이 많지만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산기마을을 지나다 보면 저기 논이나 밭에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막걸리 마시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냥 길가는 사람 중에서도 조찬준 씨가 눈에 참 잘 들어온다.

변산면 마포리 산기마을에서 유기농 농사 짓는 조찬준 씨, 조씨는 매우 특이한 복색을 하고 있다. 수염에, 상투에... 여름엔 밀짚모자에 고무신, 겨울엔 어려서 썰매 탈 때 쓰던 털모자에 할머니들 신는 가에 털 달린 털신이다. 이런 차림으로 논두렁, 밭두렁, 고샅 가릴 것 없이휘적휘적 휘젓고 다닌다. 인사동, 광화문, 사둔네 잔치...? 말할 것 없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만나자고해도 확신컨데 그의 차림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부안21

가까이서 보면 길다란 수염과 꼭대기를 뾰족하게 쓴 벙거지모자 때문에 누구든 한번 보면 잊지 못할 남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어 그렇다지만, 재밌는 건 저 멀리 있는 조찬준 씨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가 눈에 자극적인 원색의 옷을 입거나, “나 좀 봐주쇼”하는 특출난 행동을 하진 않는다.

오히려 주변 환경에 잘 묻어있어, 논밭이나 마을이나 오토바이 위에서나 언제나 있는듯 없는듯 자연스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혹시 고급 분신술과 둔갑술 같은 도술을 부리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김장하는 날 이성림, 조찬준 씨네를 찾았다.

산기마을 김장 울력
이성림, 조찬준 씨네 김장일은 애초 12월 18일로 계획되었는데, 동네에 상 당한 집이 있어 이틀 뒤로 밀렸다. 산기마을은 동네행사 뿐만 아니라 집안 대소사까지 마을 주민들이 울력을 하기 때문에 이런 조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요즘은 도시에 사는 가족들의 김장까지 시골에서 하는 경우가 많아 김장 양이 대체로 늘어난 이유도 있어서 김장은 동네 울력으로 자리잡혔다.

농촌의 입장에서 보면 공동화된 농촌에서 가족의 이름으로 이중착취를 당하는 셈이다. 어쨌든 12월 20일에는 이성림, 조찬준 씨네에 산기마을의 아주머니들이 10명 가까이 모여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꽃피웠다. 한 아주머니는 외지사는 딸에게 전화가 와서 또 할머니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이런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점심식사 때는 이성림 씨가 숭늉을 떠다 조찬준 씨 앞에 놓으니, 다른 아주머니들이 “오래 살고자프믄 아낸테 고로코롬 해서 안된다”느니, “저래뵈도 둘만 있응께, 성림이한티 고렇게 애틋하두만. 내가 몰래 봤당께”하신다. 이성림 씨가 “그런 거 없이 내가 요로코롬 살간디?” 하니, 조찬준 씨 입에 웃음이 한주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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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누가 수염에 고추가루 묻었다니 손등으로 쓰윽 닦아내며, “수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을 수염이 걸러주는데, 이것이 원래 인간의 생태적인 자연스럼 아니겄어?” 해서, “그 점에서 여성은 원래 좀 불리하다 봐야나요?”라고 내가 농을 던지니, “불리하다기 보담은 다른 면에서 장점이 있는 거고. 장단점으로 따지기 보담 그저 다른 거라 봐야…” 그러신다. 내친 김에 내가 “동네 울력이라며 김장에는 아주머니들만 모이세요?”라고 물으니, “다 역할이 있지.

김장에도 머시매들 할 일이 있고, 버무리는 거는 가시내들이 해야 손맛이 나지” 하신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날 나는 별로 할일이 없었다. 마을의 다른 남자들도 들려서 일은 않고 막걸리 마시고, 김장맛 품평을 하기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었다. 음식과 막걸리가 있고, 마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면 이것이 소박하나마 잔치아니겠나 싶다.

김장철에 어느 하루를 잡아 자기집 김장을 하는 것이 다가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각 집을 돌아가며 함께 김장하고, 그래도 집집마다 맛은 그대로 살리면서, 모이고 이야기 나누며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산기마을의 김장철 풍속이다.

새로운 시작

19일은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여기 부안에는 부안군수 보궐선거와 전북도의원 보궐선거까지 도합 세개의 투표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이번 선거에 대해 이렇궁 저렇궁 한두 마디씩 입을 댔다.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북 지역정서와 선거결과의 조합은 말하는 이의 입에서부터 주변공기를 까칠까칠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조찬준 씨는 “뭐 진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서도, 선거 다음날 우리가 김장을 한다는 것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에서 대단히 의미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애매한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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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즉슨, 이명박이나 정동영이나 사실 거기서 거긴데, 애매하게 차이나느니 아예 정치에 희망걸 필요가 없도록 된 것이 차라리 잘된 것이고, 그런 와중에 김장을 하는 것은 오늘부터 김장이 발효되며 우리 밥상에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희망없는 때에 희망을 찾는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다소 엉뚱하기도 하고 동떨어진 이야기 같지만, 그래서 조찬준 씨도 농담이라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엔 정치가 밥상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전적으로 정치가 썩은 탓이다.

덜익으면 신선한 맛에, 잘 익으면 깊은 맛에, 입이 즐거운 김치같은 정치를 바란다면, 김치에게 너무 큰 실례인가? 날이 날인지라…

/허성호-부안생태문화활력소 사무국장

이 기사는 변산바람꽃-2호(부안생태문화활력소 발행)에서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