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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교장을 마룻장에 패대기치다'
식민지시기, 17세 소년 임창규의 꿈과 행동은 무모했나?
| 2015·04·27 09:43 |
▲두루마기 입은 임창규, 장가가던 날 사진(1945년)


어느 날 아침, 부안국민학교 운동장

“1944년 초여름으로 기억한다. 성황산으로 아이들이 하얗게 떼 지어 오르는 것을 봤다. 무슨 일인가 하고 물어보니, 스기다(森, 임창규의 창씨명) 형이 후배 하나를 죽이겠다고 맥아지를 잡고 산으로 끌고 가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갔다고 했다. 놀란 교사들이 산으로 쫓아가서 형을 잡아끌고 와 교장실에다 무릎을 꿇렸다.”1)

위 증언은 임창규의 동생 임방규의 증언이다. 사건은 전날 밤에 일어났다. 부안국민학교 운동장에는 가마니를 짜는 가마니틀이 60여 개가 가지런히 줄을 맞춰 놓여 있었다. 점심 먹고 오후에 고학년들이 전쟁물자용으로 쓰는 가마니를 짜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가마니틀 날줄이 날카롭게 잘려나가고 가마니틀은 운동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훼손한 것이 분명하다. 밤사이에 누가 한 짓일까, 여기저기서 수군대며 긴장감이 돌았다.
그날 아침 조회 시간에 교단에 올라 선 야마모토 긴소(山本 金藏) 교장이 노발대발했다. “어느 놈이 이런 짓을 했느냐? 가마니 날을 자른 자는 나와라. 자진해서 나오면 정상이 참작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퇴학이다.” 몇 번이나 다그쳤지만 나오는 학생이 없었다. 교장은 10시가 넘도록 전교생을 뙤약볕 내리쬐는 운동장에 그대로 세워 놓았다. 엄포도 놓고 회유도 했지만 허사였다. 교장은 하는 수 없었던지 아이들을 교실로 들여보냈다. 2)  
큰 사건이었지만 범인을 잡을 수 없으니 그저 조용히 잦아드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임창규가 후배를 끌고 산으로 오르면서 입 소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등과 2학년 임창규가 밤에 주번을 서면서 벌인 사건이었다. 주번은 두 명이 서는데, 그날은 서도에 사는 6학년 학생과 임창규가 함께 섰다. 그런데 이 학생이 임창규의 가마니틀 훼손 사건을 점심시간에 교장에게 본대로 밀고했는데, 교무실 청소하러 갔다가 이 사실을 들은 학생이 임창규에게 알려주었다. 임창규는 밀고자가 나오자마자 멱살을 잡고는 산으로 끌고 간 것이다.


▲부안공립국민학교 전경(부안초등학교 전신, 1930년대)

야마모토 교장을 마룻장에 패대기치다

뒤늦게 알게 된 교사들이 산에 올라가서 임창규를 잡아다가 안 죽을 만큼 때렸다. 교장은 창규를 꿇려놓고 뺨을 때리고 발로 차면서 아버지를 데리고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침 사이렌이 울려서 에워싸고 있던 교사들이 제각기 수업에 들어가고 교장과 창규만 남았다.
교장은 가정교육을 잘못시켰다며 부모를 계속 욕하고, 반도인(半島人) 운운하며 민족을 비하하는 말까지 들먹이자 창규는 분노가 폭발했다. 건장한 17세 임창규는 왜소한 교장의 멱살을 잡아 마룻장에다 패대기치고는 유리창을 깨면서 달아났다. 유리창 부서지는 소리에 수업하던 교사들이 뛰어나왔고 학교 밖으로 달아나는 창규를 잡으러 고함을 지르며 뒤를 쫓았다. 시내를 거의 벗어날 무렵 순찰하던 경찰에게 잡힌 임창규는 경찰서에 그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3)
부안경찰서에서는 소사를 시켜 창규의 아버지를 오라고 출두서를 보냈다. 부모에까지 죄를 물을 심사였다. 아버지는 내가 왜 가느냐고 큰소리를 쳤지만 상당한 돈을 들여 무마했다는 후문이다. 경찰에서는 가마니 틀 훼손 사건 정도로는 학생을 감옥에 보낼 수 없었던지 혹은 일이 커지면 상부의 추궁이 두렵거나 숨어 있던 반일 감정이 폭발할까봐 두려워서인지 창규를 퇴학시키는 것으로 일단락 짓고 사흘 만에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시켰다.


▲임창규, 1960년으로 추정

퇴학 당한지 3개월이 지나는 어느 날 창규는 집에 있던 돈 몇십 원을 챙겨가지고 밤에 사라졌다. 손이 귀한 집의 장손이어서 할아버지 걱정은 끝이 없었다. 창규 친구들을 찾아 알아봤지만 허사였다. “야야, 그 애가 물에라도 빠져죽지는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애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눈물을 글썽이며 할아버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긴 간짓대로 주변의 둔벙을 허적이며 혹시나 죽지나 안았는지 확인도 해봤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아닙니다. 아버님, 죽을 놈이 아니고요. 죽으러 가는 놈이 돈까지 챙겨가지고 갔겠어요? 너무 걱정마세요.”
“하기사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만”
아버지 말에 할아버지는 희망을 가지는 듯했다. 그렇지만 날마다 소식이 있을까 기다리다가 해가지면 온 가족이 근심에 휩싸이곤 했다. 창규가 행방을 감춘 지 반년이 지난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발신지는 평양 어느 여인숙이었고 창규가 보낸 편지였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해주는 창규의 편지에 온 집안이 기뻐했다. 할아버지는 평양 갈 여비를 급하게 구해오라고 아버지를 다그쳤다. 궁벽한 시골에서 어디 현찰 구하기가 쉬운가. 하지만 아이를 구해오겠다는 할아버지의 바람인데 어쩔 건가. 할아버지는 여비를 구해 편지와 함께 쌈지에 싸가지고 평양 길을 떠나셨다. 물어물어 갔더니 창규는 여관 2층 방에서 할아버지에게 절하고, “할아버지, 돈 좀 가지고 오셨어요?” 돈을 주자 같이 나가서는 평양의 고적지인 을밀대 등을 구경시키고 뱃놀이까지 시켜드렸다. 사흘 만에 손자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피로한 기색도 없이 인자하게 웃으셨다.
창규는 집을 떠나면서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로 갔다고 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독립군 부대를 만나기 위해 남만주 일대를, 흑룡강까지 항일빨치산과 선을 대려고 돌아다녔지만 끝내 접선을 못했다고 한다. 17살 소년이 아무 연고도 없는 만주에서 선을 댄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다가 승냥이를 만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결국 선을 못 대고 풀이 죽어서 돌아오다가 돈도 바닥이 나자 평양에서 편지를 띄웠던 것이다. 4)  


▲백산면 평교리 선산에서, 임창규의 동생들과 가족(2002)

왜, 가마니 날을 잘랐냐고?

임창규의 가마니틀 훼손 사건에 대한 기억은 다양하게 남아 있다. 기억치 못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아침에 학교에 갔더니 이곳저곳에 널부러져 있는 가마니틀을 봤다는 사람도 있다.

“고등과의 임 아무개라는 학생이 가마니틀의 날줄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주머니 칼로 모조리 잘라버린 사건이 발생하여 학교가 한바탕 시끄러웠다. 이 사건이 그 후 어찌 처리되었는지는 모르나 일제에 항거하는 반전(反戰)행위로 볼 수도 있는 심상치 않은 사건이었다. 단순히 학교 내의 불량한 학생의 행위로만은 처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5)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날줄을 잘랐다’는 말은 당시 상황과 맞지 않는 말이지만 70년이 지난 사건을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성밖그(서외리)에 살던 신이근의 증언이다. 6) 그는 당시 4학년으로 학교가 파하고도 학교 마당이 놀이 공간이어서 친구들이랑 어울려 땅거미가 질 때까지 돌방구처럼 놀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 고등과 2학년인 임창규와 이존영의 얘기를 엿듣게 된다.

임창근 : “니가 끊어버려라.”
이존영 : “나는 교실 밑에 들어가서 불을 지를 거다.”
         (옆에서 놀고 있던 신이근에게) “불을 지르면 니가 신고해라 ~이”


신이근은 선배들의 얘기를 농담으로만 들었는데, 며칠 후에 현실로 다가왔다. 이런 얘기를 종합해보면 임창규가 어떤 조직체를 구성해서 더불어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임창규의 가정이 특별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거나 반일 교육을 한 흔적도 없다. 집안 장손으로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살림도 못 먹고 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생활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학교 현장에서 찾아봐야지 않을까.
당시 부안국민학교의 학생들은 아침에 등교할 때부터 마을별로 모여서 대오를 정해 1학년이 앞에 6학년이 뒤를 서서 줄을 맞춰 등교해야 한다. 교문에는 목총을 든 상급생들이 서서 이들을 통제했다. 교문을 통과하면 운동장 동편에 설치된 일본의 국조신(天照大神) 위폐를 안치한 간이 신사당으로 가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참배를 하고는 각기 자기 교실로 들어갔다. 하교할 때도 반드시 이곳에 와서 하교 참배를 하였다. 7)


▲마을 앞 당북산 정상에서 임방규

학교 생활은 일본의 전쟁 준비와 관련되어 있었다. 전쟁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서 상급생들은 가마니를 짰다. 가마니틀에는 3~4명이 붙어 일을 하는데 하급생들은 새끼를 꼬아 선배들의 가마니 짜는 것을 도왔다. 또한 보리베기나 모내기, 군마에게 먹일 마초 베기와 관솔 채취, 방공호 파기에 동원되었다. 학교 교육은 뒷전이고 전쟁에 대비한 준비가 교육 과정처럼 운영되었다. 부안국민학교는 교장부터가 일본인이고 일본인 교사도 5~6명이나 있었으며 일본에 충성을 다하는 황국신민을 기르는 교육과 군사 훈련을 곁들인 교육이 그 중심이었다.
학교의 총지휘자는 야마모토 긴소(山本 金藏) 교장이다. 교장에 대한 평가는 증언자에 따라 갈리기도 하지만, 성실하다거나 일을 귀신같이 알아서 시킨다는 것에는 공통된다. 무섭다는 평가도 있다. 학생들 보는 앞에서 직접 새끼 꼬는 방법을 선보이거나 일본식 짚신인 소리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곤 했다. 끈 묶는 법과 청소 등을 가르치고 길가의 풀까지 베어서 마을 단위로 운동장에 뺑 둘러 퇴비를 쌓게 한다거나 운동회 때는 가마니 짜기 경쟁을 벌이게도 했다. 천황에게 충성심이 강해 훈장을 타고 해방 후에는 학교의 신사를 태워 재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해방 전 부안국민학교 교사를 했던 심길동에 따르면, 8) 교사가 되어 부안국민학교에 발령이 났으나 거부하고 오지 않는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교장이 너무 까다롭고 일본에 대한 충성심만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학생들에게 작업 지시를 해놓고 퇴근하면 교사들도 학생들과 함께 방공호 파기, 나무 정리, 말 풀 베기 등을 해야 했다. 또 하나는 교사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재헌 교사는 나이 든 수석교사였는데, 그를 부를 때 마다 ‘선생’이라는 호칭 대신에 ‘군’이라고 불렀다.
부안국민학교는 교육의 현장이 아니라 군대의 병영처럼 운영되었다. 이 속에서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학생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하루하루였을 것이다.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서서히 자신의 열정이나 분노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교육이 전개되었다. 이런 학교생활 속에서 민족의식이 남다르고 분노의 칼을 품은 임창규가 마소처럼 시키는 일에만 묵묵히 매달릴 수 있었을까. 그는 육체로나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생활 속에서 분노의 상징물인 가마니틀을 훼손하고 운동장에 패댕이쳐버린다. 이 사건은 자신들의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데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는 학교 교육의 파행에서 싹터온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고향, 당하마을 옛집을 찾은 임방규

당북리 사람 임창규

임창규(林昌圭, 1928~1975)는 동진면 당상리 당북리(당하마을) 사람이다. 나주(羅州)임씨로 선조들이 오래전에 입향했지만 손이 귀한 집안이다. 임병기(林炳璂, 1908~1951)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1944년 당시에는 부안국민학교 고등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부안국민학교에는 6학년을 졸업하고 입학하는 2년제 ‘고등과’가 한 학급 설치되어 있었다. 부안에 중학교가 없으니 남학생들은 중학교에 가는 대신 고등과라도 들어가려 했고, 정신대(挺身隊)를 피하려는 부안 유지의 딸들도 다녔다. 이들은 국방색의 일본군인 복장에 전투모를 쓰고 목총을 들고 총검술 훈련을 매일 같이 받았다. 9)
임창규는 가마니틀 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한때 만주로 가출까지 했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는 묵묵히 농사일을 도우며 살았다. 집안에서는 이런 창규를 안정시키려고 서둘러서 1945년 18세 때 결혼을 시켰다.
해방이 되자 창규는 몽둥이를 들고 담을 넘어서 야마모토교장 집에 들어갔다. 현관유리를 박살내자 야마모토 교장이 소리쳤다.

“어떤 놈이냐?”
“나다, 네놈 보러왔다.”
“그래, 어쩔 셈이냐?”
“우리를 못살게 군 보답으로 몽댕이 맛 좀 봐라.”


창규가 문짝을 부수자, 현관으로 나오는 교장 손에 일본도가 쥐어 있었다. 창규는 칼을 보자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돌아 나왔다며 호롱불 옆에서 동생 방규에게 아쉬운 듯 야마모토 교장을 찾아간 경위를 들려주었다.
동생 방규는 형에 대해서, “창규형은 일본에 반감은 가졌지만 조직은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체구가 건장하고 눈매가 조금은 고약하게 보인다. 몸 전체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 풍긴다. 대담하고 의리가 있고 정열적이며 사귐성이 있는 반면에 얼렁뚱땅한 면이 있어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지속적인 의지가 부족하다.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이었다.” 10)
그는 남을 설득해서 조직을 만들거나 남과 함께 무슨 일을 도모하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행동하는데 익숙하다고 할 수 있다. 후배인 김형주의 평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체격이 좋고 인물이 좋다. 스기다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그 학생은 학생들이 우상처럼 여긴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
아무튼 임창규는 주변에서 흠모할 정도의 힘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17세 때 가마니틀 사건에 머물러 있다. 더 이상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교도소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만남이 차단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해방 후에 그는 좌익 활동에 나선다. 부안군 민청에서 활동했고 예비 검속으로 매를 많이 맞기도 했고 1948년에는 변산으로 들어가서 빨치산 활동을 폈다. 한국전쟁이 나자 줄포분주소장이 되었고 9·28수복이 되자 다시 변산으로 들어가서 변산 빨치산의 참모장 등 군사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52년에 체포된다. 5년의 교도소 생활을 하고 만기 출소하지만 5·16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전에 활동했던 것을 문제 삼아 다시 구속되어 15년형을 받고 만기를 2개월 앞두고 교도소에서 옥사한다. 1975년이다.


▲고향 후배 최기원과 대화하는 임방규(2009년 1월)

불온한 생각은 정말 나쁜 것일까

임창규의 가마니 훼손 사건은 퇴학으로 이어졌다. 사람에 따라서는 임창규의 행동이 너무 과격하지 않냐, 혹은 무슨 영웅 심리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고 폄하할 수 있다. 그런데, 임창규 사건은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때다. 일본의 입장에서야 한국인을 지배하기 위해서 여러 법으로 반일적인 사람들을 옭아매고 강력하게 처벌해야 했다. 그렇다면 지배를 받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이 만든 법이나 주장을 인정하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왜 한국인들조차 일본인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과격하다느니, 법을 어겼으니 싹수가 노랗다는 둥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까지 생각해야 하는가. 식민 지배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일본인의 관점에 쉽게 휘둘리고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불온(不穩)하다는 것은 첫째는 ‘온당하지 아니하다.’ 둘째는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 사전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시대에 불온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본 통치나 체제에 순응치 않고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고 꿈을 꾸고 행동한다는 뜻일 것이다.
임창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동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일본에 길들여지는 것을 용감하게 거부하고 일본의 전쟁 준비에 자기 나름의 저항을 시도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념의 인간이다. 해방공간에서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몸을 던졌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시대와 불화(不和)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시대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 시대의 권력자들과 맞장을 떴다고 할 것이다. 권력자들 중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에 순응하고 친일에 앞장서서 같은 동족을 전쟁터에 몰아넣는 등 자신의 이득을 추구한 인간들이 많았다. 이 참을 수 없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임창규는 보고만 있었을까. 그는 분노한다. 다시 불온한 생각을 갖고서 식민지 시대에 작은 칼을 들었던 손에 분노의 총을 든다. 그의 해방 후 삶은 다음의 연구 과제로 남겨 놓는다. 논란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임창규를 누군가는 불러내어 행적을 추적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할 것을 기대하며, 그날이 쉬이 오기를 기다린다.
17살 소년이 식민지 시대에 학교에서 저항의 칼을 들었던 행동은 상식이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불의를 보고서도 저항하지 않고 불온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판받아야 하지 않는가. 해방 후 임창규의 행적을 걷어내고 그의 일제 때 행동을 조명해보려는 것이 이 글의 시작이요 욕심이다. 나는 다시 나에게 묻는다. 17세 임창규의 꿈과 행동은 정말 무모하고 불온한 것이었을까?

주-------------------------------------------------
1) 임방규, 1932년생, 2014.11.8. 증언
2) 임방규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 (14)몽둥이와 일본도, 다음 블로그 ‘작은 것 하나’ 연재, 2010.
3) 교장을 패대기친 사건은 야마모토 교장과 임창규만 알 수 있는 일로 임방규가 형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
4) 임방규, 앞의 자서전, ‘(14)몽둥이와 일본도’와 임방규의 증언으로 꾸며봄.
5) 김형주, 『김형주의 못다한 부안이야기』, 밝, 2010, 77쪽.
6) 신이근, 1934년생, 2014.11.8 증언.
7) 김형주, 『부안이야기』 창간호, 「내가 겪은 일제 식민 교육과 태평양전쟁」, 2009, 41쪽.
8) 심길동, 1926년생, 2006.3.5 증언
9) 김형주, 『김형주의 못다한 부안이야기』, 45쪽.
10) 임방규, 앞의 자서전, (14)몽둥이와 일본도.


/ 정재철(백산고등학교 교감)

'부안이야기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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