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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인물, 항일독립투사 '백정기'
부안의 역사적 인물들에서 삶의 미래를 보다-2
| 2016·05·27 12:00 |
▲1946년 백정기 의사를 비롯하여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운구해와 효창원에 안장했을 때, 이들 3의사를 추모해서 발간한 화보
<구파백정기의사기념관 자료>



백정기(白貞基, 1896~1934)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 전 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공존을 이룩함이나 공생공사의 맹우 여러분 대륙 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겨레에 미치는 마지막 소원을……”

중국 상해에서 백정기 의사가 1933년 3월 17일 의거한 날, 침략의 거두 아리요시 일파 도륙을 모의하여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2004년 6월 5일, 정읍의 영원면 은선리에서는 항일독립투사인 구파鷗波 백정기 의사 의열사 준공식 및 영정 봉안, 동막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기도 했고 정읍의 역사인물로 추앙받으며 구파백정기의사기념관도 건립된 백정기는 출생지가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부안의 부안읍 신운리(당시 남하면 내진리)이다. 백정기는 부안의 역사인물로 자리 매겨져야 한다. 부친인 가난한 농부 백사순을 어려서 일찍 여의고 12세 때 은선리로 이사한 것이다. 영원에서 생활한 것도 한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편모슬하에서 성장하면서 백정기는 13세에 영원면 일대의 부호로 알려진 창녕조씨 문중의 규수와 결혼했지만 23세 때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눈 떠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3·1운동을 목격하고 급히 귀향, 동지들을 규합하여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의 한계를 실감한 그는 무장투쟁으로 전환, 인천의 일본군 기관을 습격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으나 이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큰 사건이었다. 한편, 그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및 아나키스트들과도 교류하였고,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서울에 들어와 체포되었으나 광부로 신분을 속여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중국 북경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정화암, 신채호 등과 만나게 된다. 이때 이회영, 신채호 등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에 빠져들어 1923년 중국 호남성 둥팅호 근처에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농촌사회건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뒤 1924년 일본에 들어가 동경의 조천수력공사장의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히는 한편, 노동문제에 대한 이해도 넓혔다. 무정부주의는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으나 누구도 속박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대표되며 항일투쟁에 있어서는 민족주의, 공산주의와 더불어 3대 사상 중 하나로 꼽히는바, 노동자와 농민 등을 독립운동의 주체로 보고 전면적인 무력투쟁과 식민지 민중의 직접행동을 주창했다. 백정기는 훗날 법정에서 “장엄한 혁명 앞에 흘리는 피눈물은 혈탄血彈뿐이다”고 말했으며, 당시 일본에서 발간된 아나키즘 잡지 『흑색신문』은 백정기를 가리켜 “인류 해방의 첨단에 선 반역자며 열렬한 톨스토이주의자”로 묘사하였다.

◀육삼정 의거 실패로 피체된 백정기 의사의 모습, 이강훈, 원삼창, 의사와 함께 상해 영사경찰서에서 심문받고 있는 장면을 당시 일본통신사의 상해특파원이 찍은 사진, 1987년 제일교포 조규식 씨가 입수했다. 일제에 대한 백정기 의사의 분노가 얼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구파백정기의사기념관 자료>

그는 무정부주의자로서 활발하게 의열투쟁했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정의공보』를 발행했으며, 1928년에는 중국 남경에서 열린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 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고, 1930년에는 북만주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중훈련에 힘썼다. 1931년에는 한국, 중국,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흑색공포단을 만들어 만주 중국 등지에서 일본 기관들에 대한 파괴, 요인 암살, 친일파 숙청 공작을 추진했으며, 상해에서는 각지에서 모여든 무정부주의자들을 이회영, 정화암과 함께 규합하여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무렵 그가 벌인 거사로는 여순에서 일본 수송선 1만 5천 톤 급을 폭파한 일이며, 다른 여러 곳의 폭탄의거와 함께 일본 관민에 준 위협은 적지 않았다. 또한 그는 1933년 이강훈, 이원훈 등 동지들과 함께 홍커우공원에서 연회 행사 중인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有吉明]와 일본 대사관원, 그리고 친일 중국인사 등을 습격하려다 붙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으로 죽었다.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나는 곧바로 일본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조국광복에 몸을 바쳐 무도한 왜적에게 학살당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고 국내에서 장례 준비를 추진했다.” 이들과 함께 백정기는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되었다.

/고길섶(문화비평가)

<변산바람꽃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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