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21

뒷길에서 보는 옥여동, 왼쪽이 소공의 집이다

걷다 보면 마음 편하고 아름다운 길이 있다. 옛 생각으로 다시 찾았다가 실망과 안타까움으로 발길 돌리는 맛 잃은 길도 있다. 사람 손이 많이 탄 곳은 대개는 실망으로 가득하다. 요즘에는 옛 길 없애고 넓고 반듯하게 내는 것이 흐름이고, 길이란 목적지에 빨리 닿으면 그만 아니냐는 편리함이 지배한다. 제주를 다녀온 사람들은 '올레길'을 말하는데, 이런 칭송을 잔뜩 받는 길은 제주사람들이 걷던 마실길 이었다. 그러나 지역에서 이런 마을길 하나 보존하자는 주장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기 보다는 상대방을 환경주의자라거나 좌파라는 편리한 낙인을 찍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부안의 아름다운 길

격포에서 봉화(烽火)를 올리던 월고리 봉수대를 자주 오른 적이 있다. 이곳을 처음 찾던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언덕을 넘으니 숨겨진 마을이 보였다. 궁항이라는 어촌이다. 감추어 놓고 매만지고 싶은 아름다운 바닷가였다. 이곳 넘어 뭐가 있겠어? 라고 기대 없이 갔다가 사람들의 숨결과 이 아름다운 항구를 만나다니 무슨 행운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광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이곳에 이런 저런 건물들이 들어서고 궁항이 갖는 한적함이나 길손이 갖는 낯 섬이 없어지고 설익은 도시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곳으로 화려한(?) 변모를 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그나마 성공 아니냐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투고 싶지 않다.

소공이 걷던길 1

대소는 대소래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석포마을 지나 이곳을 찾을 때면 실록에 나오는, ‘변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소와 말로는 갈 수 없고 사람이 바위에 개미처럼 붙어서 가야한다’ 는 대목이 생각난다. 바위를 타고 긴장하여 땀 흘리며 이 길을 넘자 널따란 분지가 나타났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봄직한 그런 풍광이다. 몇 년 후에 가보니 이곳은 차가 오를 수 있도록 상당 부분을 깎아냈다.

초등학교 때 찾았던 개암사는 길 양쪽으로 전나무가 있어 내소사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걷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스팔트길로 바뀌었고, 전에는 다리 건너서 오른쪽의 대숲을 돌아 왼쪽으로 가면 대웅전 마당에 닿게 되는데 언제부터인가 층계를 만들어서 곧바로 대웅전을 만나도록 직선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웅전 앞을 꿋꿋이 지키고 있었던 귀엽고 앙증맞은 당간지주는 옆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에는 새롭게 만든 큼지막한 당간지주가 낯설게 들어섰다. 개암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당간지주를 새로 깎아서 그곳에 세우면 사찰의 위상이 갑자기 높아지기라도 할까.

퉁소를 벽에 걸어 놓으면

달마를 그렸던 소공 이명우(簫箜李明雨 1923~2005)의 집을 찾는다. 부인 반야심(般若心)과 2남 2녀의 셋째인 화가 석당(石塘) 이송헌(李松軒)이 반긴다. 새로 개발했다는 차를 함께 나누며 가족 얘기를 듣는다. 큰 아들은 가수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어느 날 출가하여 선혜(禪慧)스님으로, 둘째는 비구니 동명(東明)으로 수행 중이다.

소공의 방에는 ‘소공명정’(簫箜茗鼎)이 판각되어 있다. 의재 허백련(毅齋許百鍊, 1891~1977) 이 써준 글로 ‘차가 끓는 방’이다. 소공은 부안에서 다도(茶道)를 일찍이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사진을 하는 만우당이나 한방을 하는 남일당 주인이 그들이다. 처음에 차를 끓일 때는 부엌에서 나무로 불을 지펴서 찻물을 끓여 차를 마시다가 석유곤로 하나를 장만했다. 차를 마시기 위함이다. 겨울에는 화로를 이용했는데, 화로에 장작 숯을 놓고 재로 덮었다가 차를 끓일 때면 덮던 재를 허적여서 쇠 주전자를 얹어서 차를 끓인다. 이 화로의 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간다.

소공의 집 정원을 가리키는 '전향원'

소공(簫箜)은 이명우의 호이다. 속을 비운다는 뜻을 가졌고 퉁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가 좋아한 악기다. 젊은 시절 선방을 찾아다닌 그로써는 퉁소를 좋아했지만 배울만한 시간은 없었다. 나이 드니 배운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퉁소를 잘 만든다는 사람한테서 퉁소를 장만하기도 했다. 퉁소를 벽에 걸어 놓으면 바람 소리와 함께 퉁소의 애잔한 선율이 들리는 듯했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작가 카릴 지브란의 말을 빌리자면 퉁소를 즐기는 소공도 혼자이고 퉁소도 저 혼자이다.

바람소리 가득한 길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遲耘金錣洙, 1893~1986)는 소공에게 목전석취(木顚石醉)라는 글귀를 써 주었다. 나무를 보면 넘어지고, 돌을 보면 취한다는 뜻이다. 소공이 나무와 돌을 그렇게 좋아했다는 말이다. 정원에는 온갖 나무들이 꽃을 내고 멀리에서 가져온 돌들로 탑을 쌓았다. 처음엔 108기를 쌓으려했으나 쌓다 보니 훨씬 넘었다. 숫자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쌓는데 정성을 다했다. 전향원(篆香園)은 그가 만든 집 정원 이름인데 향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전(篆)자와 같다는 뜻이란다. 그는 향냄새를 좋아했고 집 안에 불당을 만들어 새벽 예불을 드리고 금강경을 암송했다.

소공이 내소사 주지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내소사의 전나무를 중선배의 돛대로 이용하고자 했지만 사찰 재정의 어려움에도 전나무 파는 것을 막았다. 사찰을 떠난 후에는 다 하지 못한 선(禪)공부에 대한 미련이 컸다. 그는 바둑이나 장기 등을 하지 않았으니 선 공부에 방해가 된다 해서이다. 재가승(在家僧)인 소공의 주변에는 대화할 상대가 별로 없었다. 그의 대화 상대자는 전향원에 있는 돌탑들과 나무들이 아니던가. 이들은 의미를 애써 만들지 않고 보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맡긴다. 소공은 집에서 혼자서 막걸리를 중발에 따라 마시면서 단가(短歌)를 자주 불렀다. 선 공부가 중간에 꺾인 것에 대해 참아왔던 아쉬움을 노래로 표현했다.

성황산 뒷길에 ‘소공거사 집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는데 찾을 수 없다. 성황산 뒤로 도로가 뚫리면서 이 집을 찾을 때 갖는 맛도 많이 잃었다. 하지만 지금도 걷는 맛이 소롯이 남아 있다. 소공의 길 따라 옥여동으로 넘어가는 길모퉁이에서 대밭과 소나무를 만난다. 소공이 걷던 길, 밤에 혼자 걷기에는 소삽하다. 솔바람 소리와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금방 무엇이라도 나올 것 같아 오던 길 돌아본다.

/글·사진 정재철

정재철은 백산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