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21

밭갈이 하는 농부시인 '박형진'

노태우정권 들어서면서 서해안에 바람이 불었다.
'대망의 서해안시대'를 외치며 노태우가 일으킨 서해안개발바람이 그것이다.
이 서해안개발바람은 변산반도 끄트머리에 있는 모항이라고
비껴가지는 않았다.
인적 없는 오지 어촌마을에 콘도가 들어서고,
잘 포장된 도로를 타고 미끈한 자가용들이 밀려들어왔다.
땅값이 오르고,
해안가 바람통이나 산기슭 깔끄막에
자갈밭이라도 몇 뙈기 있는 사람들은 팔아서 도시로 떠났다.
텅 빈 모항 마을은 외지인들로 채워졌고...
그래도 몇몇은 아직도 바다에 그물 던지고, 밭 갈며 모항을 지키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농부시인 박형진 님이다.
'이랴낄낄..,' 쟁기질이라도 할랴치면
구경났다고 지나던 자가용들이 멈춰 서며
카메라를 들이댄단다.

아래에 박형진 님의 글을 따 올린다.

혼자 남겨진 요즘

글· 박형진

이제 동네가 좀 조용해졌다. 동네 뒷 장불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끼고 펼쳐진 조그 마한 해수욕장에 여름 내내 도시에서 온 피서객들이 북새통을 떨어대더니 처서 지나 가을 바람이 부는가 싶자 썰물이 빠지듯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변산반도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이 조그마한 어촌은 적어도 내년 여름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옛날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멸치떼가 밀려오면 멸치를 잡고 겨울 얼음처럼 찬 바닷물을 타고 숭어떼가 찾아오면 숭어 그물을 던질 터이다.

정월의 설, 보름명절 다 지나고 그믐 무렵 잡히는 주먹만한 낙지 쭈꾸미는 또 얼마나 맛이 있던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아서 바다에 그물질을 나가도 혼자요 그 그물질로 잡은 생선 안주에 술을 먹을 때도 함께 먹을 친구가 없다.

몇 년 전부터 불어닥친 서해안 개발 바람은 버스도 몇 번 들어오지 않는 이 오지 어촌마을에도 아스팔트 신작로를 깔리게 하고, 이름도 낯설은 콘도를 세우고, 미끔한 자가용을 타고 온 도시 사람들은 콘도에 투숙하고, 해수욕을 즐기다 수영복 차림으로 쌍쌍이 팔짱을 끼고 동네를 휘젖고 다니게 했다.

그걸 보고 장가 못간 내 친구들은 하나 둘 서울로 가고 땅값이 오르자 한두 마지기씩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에게 팔아 넘겼다. 오십여 호 육백여 명의 사람들이 불과 몇 년 새 백오십 명이 채 못 되게 줄었으니 이제는 조상대대로 부치던 땅도 남의 땅이요, 동네는 외지 사람들의 동네로 변해가고 있다.

무분별한 개발 바람이라는 것은 이렇듯 전통적인 어촌마을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전 국토를 관광지로 만드는 데 정신이 없다. 이로써 얻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고용의 창출과 생산의 극대화도 아니요, 오로지 퇴폐적인 도시문화와 상업주의만 판을 쳐서 건강하게 땅을 가꾸고 그물을 던질 줄 아는 시골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자고나면 하룻 밤 새 포크레인의 삽날에 검붉은 상처를 드러낸 저 깎이고 잘린 들판과 산허리와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마구 버려지는 쓰레기, 쓰레기 더미들, 어찌할 것인가?

이런 육공화국의 서해안 개발 바람을 문민정부(?) 들어서서도 국제화.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 자연과 사람 사이, 아니 모든 생명있는 것들 사이의 전통적이고도 유기적 인 관계를 부정해 버리고 있다.

나는 혼자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이유들로 늘상 혼자 있다. 지금도 내 외딴 조 각밭에서 혼자 괭이질을 하고 있으니 차라리 나 같은 사람은 "여럿이 있을 때"라는 제목의 글을 써야 하리라.

여렷이 있다는 것은 한 마을이 됐든 단체가 됐든 살아 있어서 그 속에서 해야 하는 일과, 놀이와, 음식을 나누는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교직되어 이루어지는 공동체일 것이 분명하니까.

그런 세상을 회복하고 싶은 생각이 혼자 있어 더욱 간절하다.
/월간 불광(佛光)1996년 10월호에서

박형진 님은 '92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봄편지>외 6년으로 등단하였으며, 현재 전북 변산 에서 농사를 지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시집 <바래속 감자싹은 시들어 가고>와 최근 산문집<호박국에 밥말아 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세던>을 펴냈다.

글쓴이 :   부안21  작성일 : 2003년 02월 28일 08시 19분 15초    조회 : 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