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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계화 이주민들의 신주거공간은 어땠을까
1970년대말~1980년대를 들여다보는 낯선 공간의 삶
| 2015·03·31 11:13 |
▲계화도간척지 전망대-계화도농업통합개발사업준공기념탑


계화도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 준공비
지금 여기 이 준공탑과 정자를 세운 자리는 지난날 조봉산이라 부르던 조그마한 섬이었고 북쪽에 높이 솟은 저 산은 본시 계화도로서 부안고을 백제때 옛이름이 끼쳐 남은 곳이다 서해의 조수가 밀려들면 파도소리만 요란하고 조수가 물러나면 아낙네들 조개 줍던 여기가 오늘은 씨 뿌리고 김 매고 벼향기 무르익은 양전옥토로 바뀌어질 줄 어느 뉘가 알았으랴 이것은 박 정희 대통령의 특별분부를 받들어 우리 지식 우리 기술 강인한 의지와 끈기로 불모지 갯벌을 이와같이 개척해 놓은 것이다. 이 어찌 민족의 자랑스런 업적이 아니겠는가 눈을 들어 여기 이 망망한 들판을 바라보라 동쪽에 쌓은 1호 방조제는 9254미터이요 서쪽에 쌓은 2호 방조제는 3556미터이며 섬진강물을 이끌어 온 물길은 51키로미터요 그 물을 가둔 청호저수지 면적은 447헥타 이같이하여 조성된 2741헥타의 농경지에서 증산되는 식량은 미곡 맥류 十만석이 넘거니 여기 정착한 농민들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국토의 지도 모양을 새로 그려 거기 이 시대 민족행진의 힘찬 모습을 새겨 역사의 증인을 삼아 자손만대에 길이 전한다.

                   1978. 6. 1
                   노산 이 은상 글 찬내 김 충현 씀


계화면의 계화간척지를 둘러싼 창북리, 돈지리, 계화리 사람들 상당수는 계화도 간척사업 후 이주민으로 들어와 정착한 주민들이다. 계화도 간척사업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계화도농업종합개발사업’(동진강수리간척사업)의 이름으로 발상되었으며, 1963년 3월 15일 물막이 공사를 착공하고 1974년 11월 13일 내부 개답공사를 착공하여 1978년까지 1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당시로서는 대한민국 최대의 대규모 간척사업이었으며, ‘쓸모없는 땅’으로 보였던 계화도 앞바다 갯벌을 ‘광활한 황금벌판’의 농지로 만들었다. 이 무렵 계화도 간척사업과 동시에 진행된 사업이 바로 섬진강 다목적댐의 건설이었고, 이에 따라 임실군과 정읍군에 걸쳐 2,786세대 19,851명의 수몰민이 발생하였는데, 이들 수몰민 일부가 계화로 들어온 것이다. 이런 역사적 상황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이주민의 삶의 환경 특히 주거공간이 어땠는지는 잘 알지 못하고 관심 또한 없다. 이미 지나가버린 3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잊혀져버렸고 주거공간은 그동안 많이 바뀌어졌다. 먹고 살고 자는 공간으로서의 주거공간은 민초들의 생활공간이자 문화적 흔적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부안이 기억해야 할 1970년대 말 그리고 1980년대 이주민들의 주거공간 풍경이다.


▲계화면 계화리 전경

1,000채가 모두 부실공사

계화도 간척사업은 이주민들의 삶터를 위하여 지대가 높고 생활용수의 공급이 원활한 전통 자연취락에 덧붙여 도시계획형 취락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기존에 어촌이었던 창북리, 계화리, 돈지리 등 세 곳이 주택단지 대상지구였다. 주택단지는 소방도로가 개설되고 그 양편에 같은 양식, 같은 규모의 가옥을 잇달아 배치하는, 획일화되고 농촌 정서와도 안맞는 일자직가단열형(一字直家單列型)였다. 주택은 1,684동의 주택을 일시에 건립해야 하고 입주자의 비용 문제 등이 있어 특수아연처리 함석으로 된 조립식철골조로 지어졌다. 입주자 신청이 적어 실제로는 1,000동(창북리 484동, 계화리 241동, 돈지리 275동)이 건축되었으며, 1976년 3월에 착공하여 1979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주거, 상업, 녹지 지역으로 계획하여 농가세대당 100평 내외의 택지가 공급되었는데, 건축비는 15평형(761채)이 보조금 43만원, 융자금 100만원, 자부담 32만원으로 총 175만이고, 18평형(239채)이 보조금 43만원, 융자금 125만원, 자부담 35만원으로 총 203만원이 소요되었다. 1991년에 발행된 『부안군지』는 거주 공간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가옥구조는 큰방 1, 작은방 2, 마루, 부엌, 목욕탕을 구비하고 있다. 마당으로 향해서 마루방이 있고 마당과 마루 사이에는 유리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다. 마루방에서 곧바로 마당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고 우리 농촌 가옥에 흔한 터돋음한 토방은 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광활 간척지의 가옥에 비하여 채광은 최대한 고려된 구조이나 다른 지방보다 강한 해풍과 겨울의 추위에 대비한 시설이 결여되어 있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주택은 여름에는 몹시 덥고 겨울에는 몹시 춥고 강풍에는 흔들리는 감이 있고 잡음이 크게 난다고 말하고 있다... 장독대는 아직 그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고 대체로 집 뒷곁 부근에 간이 장독대를 설치하거나 지붕 처마밑을 따라 열지어 장항아리를 늘어놓는 형태가 많다. 이 간척지의 주거공간은 아직도 개척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거주자들의 생활편의를 배려한 합리적 공간배열이 주택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전라북도 건축협회의 진단 결과 1,000채가 모두 부실공사를 했다고 보도했다. 천장, 미장, 외벽, 목공, 전기 등 48개 부문공사에 규격 미달용품을 사용하여 지붕철판에 구멍이 나고 부엌은 연탄 사용도 못하게 지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계화 주택단지는 건축허가 등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아 불법 건축물로 지어졌다. 뿐만 아니라 주택융자금이 결손되는 사태도 빚어졌다. 1978년부터 융자금 상환이 시작되어야 하나 간척답이 초년작인지라 염해 및 미사질토의 급수 곤란은 물론 간척지에 대한 경험 부족 등으로 정상 영농이 불가능한 이유가 컸다. 또한 타지역으로 이주하는 농가도 늘어났다. 불법 건축물 문제는 1985년에 양성화되었고, 융자금 상환 문제는 1986년에 주택을 매각 처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983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생산공간과 주거공간의 분리

계화간척지의 공간구조는 생산공간과 주거공간의 계획적이고도 완전한 분리라는 특징이 있다. 이는 간척지의 염분 제거, 식수 공급 등의 이주민 생활문제와 기계화된 영농이라는 농촌 근대화의 과제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이때는 새마을운동이 한창 무르익을 때였고 주거공간도 도시형으로 개발되었다. 주거공간의 내부구조가 도시형 주택단지로 설계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1991년에 현장을 연구한 장명환 씨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 지역의 공간구조가 다른 간척공간과는 매우 상이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업 생산활동을 목적으로 간척된 다른 간척지의 공간구조는 농업 생산활동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경지와 가옥과의 거리마찰을 극소화시키는 방향으로 주거 공간구조가 결정되어, 경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취락을 분산, 입지시키는 공간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계화 간척지의 경우에는 다른 간척지와는 달리 취락과 경지를 분리하여 취락이 경지의 주변지역에 위치한 공간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계화간척지의 공간구조는 노동 투여시간과 노동 투여횟수가 많은 미작지역의 경우 일반적으로 가옥과 경지를 근접시키는 것과는 달리 양자가 서로 유리되어, 생산활동에 공간마찰을 일으키고 있다."(장명환, 계화간척지 주택구조의 변화에 관한 연구, 전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1).


▲계화리 국민주택단지내의 조립식주택


▲계화도 간척지와 주택지구 <출처 : ‘부안군지’(1991)-부안군>


▲계화도 간척지 신주택단지 주택 평면도(15평형)<출처 : ‘부안군지’(1991)-부안군>


계화간척지에 조성된 신주거공간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었던 15평형 가옥은 조립식철골조로 큰방 1, 작은 방 2, 마루, 부엌, 목욕탕, 화장실을 갖추었다. 도시형인 이 가옥은 터돋음을 하지 않은 시멘트 콘크리트 기초에 철골조 프레임 2중으로 공간을 두고 특수아연처리된 함석으로 벽과 지붕을 조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옥자재와 건축방법으로 지어진 조립식주택은 염분 높은 강한 바람에 노출된 이 지역에서 함석은 염분으로 부식되고 벽면과 지붕 등의 각 접합부는 쉽게 파손되므로 매우 부적절했다. 여기에 부실공사까지 겹쳐졌으니 주민들의 삶은 매우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늦게 지어진 와가형(瓦家型) 주택의 경우 많이 보완되었다. 특히 농가는 단순히 거주만 하는 기능을 갖는 게 아니라 영농활동과 공간적으로 연계되어야 하므로 그에 따른 창고, 축사, 건조장, 작업장 등 부대시설이 딸려야 하는 바 그런 환경조건과 거리가 멀었다.
이런 주거공간 환경으로 인해 상당수 가옥들의 본채는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우선 빈집(공가)으로 버려진 경우가 발생했다. 197-80년대는 농촌이탈이 광범하게 전개되었으므로 어느 농촌에서든 공가화(空家化)는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일이었다. 1990년 무렵에 조사된 바로는 창북리, 계화리, 돈지리 세 부락 전체의 조사대상 590개 가옥 중 공가수는 총 51가옥으로 8.6%로 나타났다.
“계화 간척지에서 공가가 발생하는 또다른 요인은 계화 간척지 고유의 자연적 조건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기인하고 있다. 간척지의 농지는 염기의 함량이 높고, 모래가 많은 토양조건을 갖고 있으며, 또한 해안지역의 강풍 등의 불리한 기후조건과 같은 농업 생산에 불리한 자연조건으로 인해 개간 초기에 수확량이 적다. 반면에 이 지역에 입식(入植)된 주민들은 운암댐 건설로 인한 수몰민들이었기 때문에 적은 수확량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을 극복할 경제적 여유를 가진 주민이 적었다. 경제적 여유를 갖지 못한 주민들은 불하받은 농지를 처분하고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 중 일부는 토지만 매매하여 처분하고 주택은 비워둔 채로 도시로 이주하여 공가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장명환). 돈지리의 경우 빈 공가의 일부는 돼지, 개, 닭 따위들을 키우는 축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계화면 창북리 국민주택단지 <출처 : ‘약진하는 새부안건설’(1984)>

조립식주택, 증축에 보수에

본채는 아예 헐어버리고 신축하는 집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기존 조립식주택의 측면이나 전후면에 새로 방을 들이거나 창고 따위들을 달아내는 증축 방식이었다. 기존 주택의 지붕에서 바깥쪽으로 처마를 담까지 이어내 슬레이트 지붕으로 덮고 이어낸 처마 끝에 시멘트 벽돌을 쌓아 공간을 확보하였다.
다음으로 지붕 개량을 들 수 있다. 함석지붕을 슬레이트지붕으로 바꾸는 경우들이 있었다. 조립식주택의 건축자재가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조립식 주택은 특수처리아연 함석을 건축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외부와의 열 및 소음의 차단효과가 미약하여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우며, 우천이나 강풍시에는 소음이 매우 큰 단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함석은 염기를 함유한 바람과 연탄가스에 쉽게 부식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가옥의 부식은 창북의 경우보다 바다에 접해 있는 계화와 돈지의 경우에 보다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장명환)
그러나 실제로는 지붕개량이 이루어진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서 장명환은 “주민들의 조립식주택에 대한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조립식주택을 영구주택으로 인식하지 않고 가건물로 인식하여, 지붕개량에 소요되는 많은 비용을 투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보았다. 반면에 설치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처마는 조사대상가옥의 43.4%(256호)나 되었다. 직사광선이나 비바람 차단이 실생활에서 매우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화간척지 신주거공간이 도시형주택단지여서 화장실 외 부속시설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채 분양되었다. 그러나 영농활동을 하다보니 여러 공간들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1991년 당시 부속공간을 갖춘 가옥들이 314가구(59.9%)나 되었다. 사용 용도는 축사(닭, 개, 돼지, 소), 창고, 건조장, 방, 가게 등이었다. 특히 창북에서는 면소재지여서 가게로 사용하는 용도가 훨씬 높았다.



국가폭력이 낳은 열악한 삶

계화의 이주민들은 애환의 삶이었다. 선주민들이라도 형편이 좋을 리는 없었다. 부안군에서 1991년에 펴낸 『부안향리지』를 들춰보면 “70년대 이전에는 천수답에 의존한 (조포)마을 주민은 쌀 한 톨 얻지 못하는 흉년이 계속되면서 3~4년에 한번씩 양식을 장만하기도 하였지만 거의 초근면피로 연명하였다”고 하면서 “계화 간척공사 전의 생활 상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낯선 계화에 정착한 임실과 정읍의 수몰민들이 부안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섬진강댐의 수몰민이 되어 쫒겨나는 과정에서도 보상비나 이주대책 등의 문제로 평탄치 않았으나 객지인 새로운 터전에서도 험악했다. 보상비는 이미 빚을 갚거나 생활비에 다 써버렸고 간척지는 제염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등의 어려움은 차치하고 마을의 선주민들이 ‘텃새’를 심하게 부렸다. 이주민들을 잡아다 두들겨팼다는 증언은 이주민이나 선주민 공히 하는 말이고, 선주민은 이주민을 ‘사람취급도 안했다’고 한다. 한국의 현대사가 낳은 아픔이었으나 시간이 약인지라 그런 기억은 이미 가물가물해졌고, 지금은 모두가 부안사람 계화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들의 주거공간의 변화는 결국 그들이 부안사람이 되어가는 또하나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당시 신주거공간의 공간환경 및 생활양식은 매우 열악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국가폭력에 희생되며 감내해야 했던 이주민들만의 특별한 형태였던 것이 아니라, 부안의 또다른 역사적, 문화적, 인류학적 경험이자 기억으로 남겨져 있다. 여러모로 연구해볼 일이다.

/ 고길섶(문화비평가)

'변산바람꽃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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