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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자연마을에 조성됐던 이주민들의 삶터
계화 조포마을

보부상이 동진강을 거슬러 오르다 정착
| 2015·04·06 09:37 |
▲계화면 양산리 조포마을


계화의 조포마을은 1970년대 이후 특별한 경험을 가진 마을이다. 전통적으로 존재해온 자연마을이 계화도 간척사업을 하면서 완전히 달라진 사례다. 수몰민 이주민들의 삶과 관련하여 <부안독립신문>에 기고했던 2009년 당시의 현장탐사글을 여기에 옮긴다.

계화면 창북리에서 계화리 쪽으로 조금 가다 우회전하여 줄곧 달리다보면 비교적 큰 마을이 나옵니다. 주변 일대가 워낙 넓은 간척지 논이다보니 마치 육지 속의 섬 같습니다. 이 마을은 필시 오래 전에는 섬이었을겁니다.
줄무늬잎마름병이 휩쓸고 간 아픈 농지에도 가을은 왔는지라 누렇게 영근 황금벌판의 농부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락 수확을 이미 마친 농가는 보리 심는 ‘전쟁’으로 한창입니다. 비 오기 전에 보리를 심어야 하므로 논바닥에 깔린 짚더미를 빨리 치워달라 서로들 아우성입니다. 10월 18일 조포마을의 풍경입니다.

보부상이 동진강을 거슬러 오르다 정착

동진면 양산리 새포마을이었던 것이 1983년 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승격되면서 계화면 양산리 조포마을로 부르게 되었으며, 조포마을은 4구까지 있으나 석산을 가운데 두고 주로 석산의 동-남-서향으로 마을이 잇달아 형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을의 산을 석산이라 합니다. 계화도 간척사업할 때 높은 석산이 다 깎여 지금은 야트막하게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포마을은 300여년 전 시산 허씨의 성을 가진 보부상이 동진강을 거슬러 오르려다 새 모양을 한 포구를 발견하고 그 형상이 기이하여 정착하며 살아 새포로 불렸다 합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바다 가운데 새 등처럼 물에 떠 있는 형상 또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의 형상이었다 합니다. 그 후 남양 홍씨, 경주 최씨, 반남 박씨가 씨족을 이루며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마을이 커 한때는 고기잡이로 번창하기도 했고 새포장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부안에 조선시대의 사창(社倉)이 다섯군데 있었으며, 그 하나는 북창(北倉)이라 하여 새포에 있었습니다. 사창이란 곡물을 비축해두어 춘궁기나 흉년에 백성들에게 꾸어주던 곳을 말합니다.


▲새포정미소라는 이름의 옛 흔적이 남아 있다. 2009년 모습.

섬진강 수몰민들의 이주터

계화도 간척지는 ‘쓸모없는 땅’으로 보였던 갯벌을 ‘광활한 옥토’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계화도 간척사업은 1963년 3월 15일 물막이 공사를 착공하고 1977년 12월 20일에 내부 개답공사가 완공되었는데, 총 매립면적 3,968ha에 농지조성이 2,708ha였습니다. 조포지구에 조성된 가경지는 241ha(72만3천평)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더러 이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짓도록 했을까요. 계화도 간척사업과 동시에 진행된 사업이 바로 섬진강 다목적댐의 건설이었고, 이에 따라 임실군과 정읍군에 걸쳐 2,786세대 19,851명의 수몰민이 발생하였는 바, 이들 일부가 조포지구에 입주하였습니다. 이들은 ‘계화도 간척지구 조포 협업농장 규약’에 따라 조포 가경지를 협업농장으로 운영하다 곧 해산합니다. 농장은 섬진강댐 이주민 236세대와 파월장병 가족 5세대에 개인별로 가분배합니다.
이때 가분배하면서 개인별로 농지분배 지정서를 발급했는데, 그후 가짜 ‘증권’으로 재산을 날려버린 이주민들이 수두룩합니다. 2구에 사는 81세의 한 할머니는 피해 당사자입니다. ‘증권’이라는 말은 그이의 표현입니다. 아마 농지분배증서일겁니다. 할머니는 30여년 전 전남 영광에서 이주해왔습니다.
“싼 논이 많이 있다고 혀서 좋은 논 팔아 여기로 왔지. 근디 그게 가짜 증권을 받아온거야. 망해버렸어. 우리처럼 귀얇은 사람들은 그렇게 다 사기당한거여. 고향에서는 밥 먹고 살았는디, 억장이 무너지지. 홧병에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매달아 죽고... 한 집서 서너집이 살면서 굶기를 밥 먹듯이 했지. 모 심어봐야 다 디져버링께. 어쩌겄어, 밥태기보다 더 작은 조개(아사리) 잡아다 팔아먹고 살았지. 쌀 한 가마 꿔오면 두 가마로 갚아야 허고, 안죽고 산일 생각허면 아슬아슬혀.”
조포마을에 새겨졌던 계화 간척지의 애환은 오늘날 생존자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가 낳은 아픔이었으나 시간이 약인지라 그런 기억은 이미 가물가물해졌고 지금은 모두가 부안사람 조포주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조포마을 1구는 선주민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2·3·4구는 이주민들이 많습니다.


▲연탄재로 만들어진 계화도 간척지 이주민 집의 텃밭. 2009년 모습.

‘부촌’ 속 가난의 흔적

1구에 사는 한 50대 아주머니는 조포마을이 ‘부촌’이라 합니다. “논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임차농사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집들이 부유한 편이지요. 그리고 여성들이 편해요. 논 농사 짓는디 약헐 때 남편허고 같이 허는 거 빼고는 달리 할게 없잖아요.”
실지로 마을을 둘러보니 좋은 집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빈집도 다른 마을에 비해 적은 편입니다. 밭이 별도로 없어 집과 집 사이에 텃밭이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텃밭에는 감자, 메밀, 무, 배추, 쪽파, 대파, 당근, 마늘 따위들이 알뜰하게 커가고 있습니다. 콩은 간척지 논두렁에 심어 그 소출이 상당하답니다.
그러나 2구 마을 다른 언덕배기에는 가난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습니다. 마을의 맨 위에 자리잡고 있는 조포교회의 동향 언덕배기에는 달동네마냥 몇 채의 낡은 쓰레트 집들이 30여년 전 간척지 시대 취락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팔순의 한 할머니는 7살배기 손녀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온갖 곳이 다 아파 매일 병원에 가야하고 힘들어 더 이상 손녀를 데리고 있지 못하겠다고 걱정스레합니다. 집이 커다란 바위 위에 지어진 집이라 마당에도 흙 한줌 없었는데 연탄재가 쌓여 쓸만한 텃밭이 만들어졌고, 그 텃밭에는 마늘 싹들이 겨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녀는 방안에서 혼자놀이에 바쁩니다.
조포마을에는 당집이 있었다 합니다. 마을의 액운이 닥치거나 바다에 나간 남편의 무사고를 비는 아낙네들의 기도장소였겠지요. 그 자리를 오늘날에는 교회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계화도 간척공사가 있었고 새만금사업이 뒤를 이으면서 이 마을은 바다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갈대숲과 조개껍질로 뒤덮였던 마을 주변의 갯벌땅은 오래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계화도 간척공사로 인해 마을이 커져 번창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또다른 풍문이 휩쓰나봅니다. 마을의 어떤 사람은 이곳이 아주 커질거라는 소문을 내게 전합니다. 아마 ‘새만금사업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입지요. 안타까운 바램입니다.

/ 고길섶(문화비평가)

'변산바람꽃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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